우린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이 되었습니다 3122번째 4월 16일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오늘은 2반 #박혜선세실리아 "엄마, 배가 흔들려. 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래..........," 세월호가 기울고 있던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3분 , 혜선이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친구 손 잡고 선생님 곁에 있어 " 라고 말했답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혜선이가 행여나 안경을 잃어 버릴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혜선이는 세월호가 침몰한지 19일만인 5월 5일 어린이날에야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혜선이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 주위사람들이 극구 만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의 기억 속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4월 15일 아침. 낑낑대며 여행가방을 끌고 집을 나서던 혜선이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남아있습니다.
혜선이는 태어날때부터 라식도 라섹도 할 수 없을정도로 눈이 나빴다고 합니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가스불도 잘 켜지 못하고 엄마나 언니를 무수리처럼 부려먹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같이 하늘나라로 간 단원고 친구들에게 엄마는 기도했다고합니다 "혜선이 밥 부탁한다고....."
혜선이는 엄마가 해준 밥이 가장 맛있다고 하였으며 아이들 보느라 힘든 엄마를 위로 한다며 엄마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다 안기기도 하였으며 아빠 머리에 원형탈모가 생겼다며 속상하다고 눈물 짓던 착하고 예쁜 딸이였습니다.
혜선이의 꿈은 동국대 국어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방송작가나 #전수영 담임선생님처럼 국어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였습니다. 그러나 혜선이는 그 꿈을 그려보지도 못하고 하늘 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은 혜선이가 하늘 나라에서 라도 그 꿈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엄마, 아빠, 언니가 이곳에서 응원할게. 엄마는 하늘만 보면 네가 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 좋겠다. 너는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착하고 예쁜 내 딸. 하늘에선 성모님이 엄마야. 자애로운 분이야. 지켜주지 못해 너무도 미안한 엄마가." 혜선이는 세월호에 타고 있던 15일 밤 9시에 엄마에게 "사랑해. 벌써 보고 싶다" 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혜선이 초등학교때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옮겨드립니다. 《2004년 선부초 근무당시 혜선이 담임을 했었고 혜선이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였습니다. 키가 우리반 여자 아이들중에 제일 작았고 그 작은키와 덩치에 안경을 쓰고 다니는 참 가녀린, 어린새와 같은 아이였지요. 그 당시만해도 1학년들은 어머님들이 학교에 오셔서 급식을 도와줄때라 엄마가 당번이여서 학교에 오시면 바로 위에 학년이였던 언니는 엄마를 찾아와 재잘재잘 떠들고 까불었던 반면에 혜선이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엄마와 언니뒤에 늘 숨어있는 얌전한 아이였어요. 우리 혜선이는 이런 내성적인 성격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품었던 꿈은 ‘모델’이였습니다. 그 당시 저도 열정이 넘쳤던지라 어린이날이 되면 기념으로 아이들 각각에게 사진과 꿈을 넣어서 그 꿈을 꼭 이루라고 책갈피를 만들어 나누어 주곤했는데 그걸 잘 간직하고 계시는 혜선이 엄마를 보니 더 정성들여 예쁘게 만들어줄걸 하는 후회를 했습니다. 십여년이 흐르고 성장한 우리 혜선이의 발자취를 찾다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국어 선생님을 꿈꾸고 있었더군요. 여리고 꿈많던 우리 혜선이... 세월호에 탑승했던 저의 여덟 제자 중에 가장 늦게 수습이 되어 마음 졸이게 했던 혜선이는 5월 연휴... 유난히 예쁘게 햇살이 비추던 그날... 그 예쁜 햇살처럼 우리 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혜선아~! 하늘에서 보고 있지? 너의 꿈이 아픔없는 그 곳에서라도 꼭 이루어지길 선생님은 늘 기도한단다. 뒤늦은 후회라 할지라도 오늘도 선생님은 너를 생각하며 말썽쟁이 녀석들 한번이라도 더 쓰다듬으며 두고 두고 마음의 빚 갚으며 살아갈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우리 혜선이...》 친구님들 혜선이의 생일을 축하하여주시고 #박혜선을 기억하여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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