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 3년 반이 흐르는 동안 저는 이 아빠의 피눈물나는 아픔을 지켜와왔습니다.
함께 기억하여주십시요.
아버지와 외동딸.
하나뿐인 외동딸을 잃어버린 아빠,
소연이는 네살때부터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소연이를 무슨일이 있어도 훌륭하게 키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일했습니다.
컴퓨터 조립공장, 화학공장, 자동차 부품공장, 프레스공장등을 다니며 프레스에 오른손 세개, 왼손 세개등 손가락 윗마디가 잘려 나가도록 소연이를 위해 일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소연이도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소연이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도맡아 하려 노력했습니다
소연이의 교복, 양말, 신발등을 빨아주곤 했지요.
부녀지간은 지극히 다정했습니다.
소연이는 노래방도 자주 함께 가면 (어머나)(꽃)등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도 불러주고, 아버지의 핸드폰 문자를 대신 날려주기도 했으며, 햄버거를 사다주면 볼에 뽀뽀를 해주곤 했다합니다.
소연이의 취미가 "아빠랑 놀러다니기" 일 정도로 아빠가 쉬는 토요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합니다.
"소연이가 좋아하는 붕어찜을 자주 먹으러 다녔어요. 그걸로 밥 두공기를 먹어요. 그러고는 집에 와서 살 찐다고 줄넘기를 얼마나 하던지. 먹었으니까 살을 빼야 된다고"
가끔은 이런 얘기도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시집 가더라도 아빠같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만나질까 모르겠어"
"아빠같은 사람 어디 있냐.아빠는 대한민국에서 단 한사람 만날까 말까여.."
소연이의 꿈은 중학교선생님이 되는 것이였습니다.
선생님이 되어 아빠 나중에 힘들지 않게 하겠다며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소연이는 장학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아빠와 친구들에게 삼겹살을 사기도했습니다.
트윅스를 좋아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며 친구들과 후배들을 먼저 배려했던 소연이는 주일이면
한부모 가정집에 가서 도배도 해주고 집짓는 일에도 도움을 주곤 했다고 합니다.
왼쪽 김빛나라, 오른쪽 백지숙우슬라와 나란히 셋이 짝궁이였던 소연이는
4월 16일 오전 9시 50분에 배가 기울고 물이 차오르자
" 아빠 나 데려가 주면 안돼요?"
"배에 물이 들어와요"를 마지막 인사로 남기고 아빠 곁을 떠났습니다.
소연이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오자 소연이가 인터넷으로 산 소설책과 참고서가 배달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엄청 울었서요. 그책들을 샀을때 열심히 살려고 그런거 아니여유,
근디 죽어 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거시유"
사고후 진도체육관에서 외동딸 소연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울보아빠"로 불리웠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소연이 곁으로 가기 위해 밤새 술로 버티시다 몇번이고 119에 실려가기도 하였으나 "우리애들을 다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못 살렸는지 " 진실을 알기위해 국회에서 투쟁을 하셨고 삭발을 하시기도 했고 동거차도에서도 청사앞에서도, 촛불집회때도 광화문에서도 소연이와 친구들을 위해, 아니,
살아 있는 모두를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