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었던 가슴아픈 아이의 생일입니다.
오늘은
"순남아"
우진이가 가장 사랑했던 이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식탁에 앉았을 때 "순남아" 학교를 가려고 자전거를 끌고 나가면서도 "순남아" 잠들기 전에도 "순남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엄마" 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두고 떠난 아들. 우진이.
우진이는 열살아래 여동생이 있는 남매중에 맏이 입니다.
여느집처럼 늦둥이 여동생을 보고 부모님과 행복해하던 시절,
우진이가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은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아빠를 좋아했고 친했던 우진이는 그렇게 누워 있는 아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진이도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엄마도 병원에서 일을 하며 아빠의 병수발을 들어야했습니다.
우진이의 본래이름은 재원이었으나 이시점에 엄마는 우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습니다.공교롭게도 우진이가 엄마를 "순남"이라고 부른 것도 이때부터 랍니다. 엄마의 버팀목을 자처하고 동생에게도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10살이나 어린 동생을 끔찍하게 돌봤습니다.
둘이서 수다를 떨고, 먹방사진을 찍고, 동생을 씻기고 하는 것도 우진이 몫이었습니다.
목욕할 때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를 자주 틀었다고 합니다.
동생은 그 노래를 들으면 오빠가 생각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마에게는 믿음직한 아들, 동생에게는 아빠같은 오빠가 됐습니다.
"순남아"
"너 왜 자꾸 엄마 이름 불러?"
"그럼 순남이를 순남이라고 부르지 남순이라고 불러?"
엄마와 의견대립이 있을때도 먼저 "순남아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고 능청스러운 아들로 돌아
오기도 했으며 엄마에게 손편지를 자주 쓰며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순남이는 오빠만 믿어"
우진이가 편지에 자주 남겼던 말입니다.
아빠가 가족곁을 떠난것은 우진이가 수학여행을 떠나기 몇달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도 우진이는 엄마에게
"고생했어 순남아. 이제 오빠만 믿어. 울지 말고.."
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우진이는 집안의 기둥, 아니, 어린 동생과 힘들어 하는 엄마가 보호받고 쉴 수 있는그런 "집"이 되었습니다.
우진이의 꿈은
축구해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태권도와 축구등을 잘했고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엄마가 돈 되는 일을 하라고 반대하자 축구해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새벽에 유럽축구를 보면서 해드폰을 끼고 모니터 앞에 앉아 해설을 하곤 했습니다.
동생을 챙기는 와중에도 시간이 나면 축구를 했고, 축구경기를 봤고, 축구 해설을 했고, 축구 게임을 했습니다.
184cm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패션 감각도 뛰어나 인기도 많았던 우진이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 동생에게
"엄마 말 잘 듣고, 금요일까지만 기다리면 돼"라고 말했고
"우진아, 안 가면 안 돼?"하며 붙잡는 엄마에게는
"괜찮아. 갖다올게"라며 긴 손가락을 들어올려 까딱이며 고개를 숙이고 눈인사를 하고 수학여행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기둥이자 집 이었던 우진이를 집어삼킨 세월호 참사.
우진이는 5월 5일 돌아왔습니다.
참사후 2주가 넘게 지났지만 예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수학여행에 싸 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차고 있던 시계도 그대로 였으며 흉터 자국도,피어싱 한 흔적도, 화상 자국도 모두 그대로 였습니다.
딱 한 가지. 입고 있는 속옷만이 우진이 것이 아니 었다고 합니다.
수소문 결과 15일밤 아이들은 서로 속옷을 바꿔 입으면서 놀았다고 합니다.
엄마는 가끔 노래를 듣는답니다.
우진이가 한 소절 부르고 엄마가 또 따라 불렀던 노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친구님들
우진이의 생일을 축하하여주시고 #선우진을 기억하여 주십시요